나의하루

나의 성장기의 한부분을 돌아보다

ssunee 2025. 4. 30. 12:28

 

 

내 성장시기를 돌아보았다.

유년시절은 여주 깊은 골짜기에서 비교적 무난히 성장했다.

나 5학년 말,

느닷없이 중학생  삼년 터울 언니를 서울로 올려보내려는 큰오빠의 계획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시골에서 서울로 너무 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가니 정부에서 중학교 이상은 금지시키는 정책을 필 때다.

꿩대신 닭으로 내가 느닷없이 서울로 오라가게 되었다.

이무슨 날벼락이라냐.

안가겠다고 울고 떼쓰고 했지만 늘 통하던 

떼가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떼로 만사유통이던 엄마도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시골학교에서 학적부가 이미 서울로 수속중였다.

반포동 아파트가 들어서고 고급진 학교로 명성이 나던 반포초등으로 내 학적부가 갔다.

촌아이가 그곳에서 적응을 못하고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6학년 올라가며 노량진 초등학교로 내학적부가 옮겨졌다.

그때 난 공부고 뭐고 없이 늘 여주금당리에 갈생각만으로 머리를 굴리고 살았다.

중학교는 신림여중으로 배당되었다.

이제 공부좀 해야겠다 맘먹고 여주로 돌아가는것은 자연스럽게 완전 포기되었다.

중2때 또 날벼락.

큰언니가 우리를 돌봐주었는데 결혼하게 되어 작은아버지댁으로 가게 되었다.

종로구 옥인동쪽에 배화여중으로 배정되었다.

그때는 종로학군이 최고였던 시기이라 그곳도 엄청나게 부유한 여식들이 많아서 개인적으로는 듣도 보도 못하는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중학생때는 나도 다소 철도들고 촌때를 좀 벗어서 그곳에서는 빠르게 적응하게 되었다.

작은집이 보문동으로 이사하셔서 그쪽으로 우리도 같이 옮겨가서 주소이전하고 학교를 배정받아야 했다

종로에 주소를 두면 종로 명문여고에 배정받을 줄 알았는데 또 공동학군이라는게 생겨서 나는 종로에 배정받지 못하고 은평구 불광동으로 튕겨 동명여고에 배정되었다. 

듣도보도 못한 학교지만 당시 대입합격률이 젤 높았던 여고로서 예일여고와 이웃해있는 장점이 있는 학교였다.

그학교의 영향을 좀 받아서 공부를 열심히 시켜줬고

그리고 종로쪽에서 넘어온 학생들이 많아서 학구열이 좀 높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개발도상국인시기에 나름 꽤나 엄청난 학교를 거쳐 다니게 되었다. 긍정의 아이콘녀, 학교복은 있었나.

아버지 없는 집에 부모님 역할을 한 큰오빠 덕분으로 나름 명문학교에 발자욱을 조금씩 남기고 지나왔다.

이후 큰오빠와 큰 갈등으로 좋지 않은 관계로 살았다.

오빠는 나름 시골에서 공부만해서 대한민국학생들의 로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들어갔다.

그러나 곧 이론과 현실의 벽을 못 넘었다.

나는 그런 오빠를 도저히 이해 불가였다.

지금은 저세상에 가셨다.

부모님곁에서 행복하실라나